빙빙

마침내 당신도 '이곳'을 좋아하기를 - 연서의 정원

큐레이터 산산

2024.07.22 12:40

연신내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연신내라는 지역이 낯설다. 연신내의 맛집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3년간 나는 거진 ‘방전’ 상태였다. 지금껏 내가 다녔던 회사들은 전부 은평구 바깥에 있어 출근만으로도 나를 방전시켰고, 퇴근 후의 나는 침대에 충전기 콘센트처럼 처박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3년 동안 내가 물리적으로 존재했던 장소는 연신내가 아니라 3호선 지하철과 회사, 내 자취방이 전부였던 셈이다.

하지만 회사는 내가 계속 존재할 장소가 되어주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질식할 것 같은 사회생활 속에서 나는 빠르게 마모되었고, 이러다 고장이 나버릴 것 같아 찾아간 정신과에서 상담을 마친 끝에, 결국 퇴사를 선택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와 불 꺼진 자취방을 마주했을 때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을 것이고,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3호선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지도 않을 테니, 지난 3년 동안 내가 존재했던 장소 중 두 곳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비로소 연신내를 돌아보기로 결심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10평 남짓한 자취방에서 외출 없이 배달 음식만 시켜 먹다 탈이 나버린 나는, 문득 영화 <빅 피쉬>를 생각했다. <빅 피쉬>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금붕어를 보고 사랑하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항의 크기에 따라 두 배에서 네 배까지 성장하는 금붕어처럼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인물이 되고자 한다.

물론 나는 성장을 논하기엔 다소 낯간지러워지는 나이에 접어들었고, 내 몸의 부피는 성장보다는 비만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빅 피쉬>의 에드워드를 생각하며 자취방을 나섰다. 앞으로 내가 존재할지도 모를 장소를 최소 두 뼘에서 네 뼘만큼은 늘리고 싶었다.

어느 월요일의 정오였다. 평일임에도 출근을 하지 않는 백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간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연신내역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나는 발견하고 말았다. ‘연서의 정원’을.

이름과 달리 ‘연서의 정원’은 카페다. 연서로와 연서시장 인근에 위치하여 연서, 라는 이름을 쓰는 카페. 유별난 메뉴를 앞세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카페도 아니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도 아니다. 그러나 연서, 라는 이름의 누군가가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며 다정한 손길로 가꿔놓은 듯한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 카페다.

내가 즐겨 먹는 메뉴는 고소한 콩가루를 뿌려주는 ‘고소콩 티라미수’와 ‘정원 라떼’, 즐겨 앉는 자리는 창가쪽 좌석이다. 골목 안쪽에 위치했어도 통유리창 덕에 볕이 잘 들 뿐더러 따스한 톤의 불빛은 혼자 찾아와 책을 읽기에 알맞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카페임에도 종종 나처럼 정원에 이끌린 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늘 앉던 대로 창가 쪽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으면 자연스레 손님들의 대화가 라디오처럼 들린다. 딱히 엿들을 생각이 없는데도 여기까지 들리는 목소리들과 한번 듣기 시작하면 계속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말들이.

하루는 자존감과 관련된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고전소설 속 대사처럼 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 나이 오십줄에 접어들도록 몰랐던 인간의 행복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인근 교회에서 찾아온 분들이었다. 삶의 괴로움을 이겨내고 편안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있으면 괜히 나까지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신앙을 통해 가슴 한구석에 들인 편안한 온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 뒤편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들이 느닷없이 브로콜리 먹어, 브로콜리 꼭 먹어, 를 합창하듯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브로콜리를 많이 먹어야 돼. 브로콜리를 많이 먹어. 오직 한 사람을 향한 브로콜리 총공격이었다. 난 서양 채소는 몸에 안 받아. 브로콜리 집중포화를 맞던 어르신이 한마디 반격을 시도하면 열 마디의 응징이 돌아왔다. 아니야, 그래도 브로콜리 먹어. 브로콜리 꼭 먹어야 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시는지 유심히 들어봤더니, 어르신들 모두 암이나 당뇨로 호되게 고생하신 탓에 이처럼 전투적인 브로콜리 신봉자가 되신 것이다. 브로콜리가 암에도 좋고 당뇨에도 좋다면서. 덕분에 나도 집으로 가던 길에 괜히 브로콜리와 초고추장을 사게 되었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항상 땅만 보며 걸어 다녔다.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어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과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구석이 없는 일들에 시간과 기력을 쏟았다. 자연스레 하늘을 올려다볼 힘도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메말라갔다. 땅만 보며 걸어 다니니 자연스레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줄어들었다. 내 자취방만 한 크기로. 금붕어가 갇힌 어항처럼.

그런 세계에서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에 점점 무뎌졌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들이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것들이 사라지니 싫어하는 것들만 늘었다.  하다못해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사소한 일상의 소음조차 싫어졌다. 그러니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회사든, 집이든, 연신내든, 알 게 뭐야.

요즘은 ‘연서의 정원’을 찾아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좋아하는 방법들을 되찾아 가는 중이다.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쓰다가 버찌인지 머루인지 모를 열매를 따 먹는 새들을 지켜보기도 하고, 호기롭게 두꺼운 책을 들고 갔다가 옆자리 어르신들의 수다만 실컷 엿듣고 오기도 한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가장 먼저 2층의 루프탑부터 차지할 테다. 판타지 영화 속 비밀스러운 다락방을 연상시키는 루프탑은 창문 너머로 붉은색 양철 지붕이 보이는 독특한 뷰를 지녔으니 결코 다른 손님들에게 양보할 수 없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그 또한 좋아해 보려고 한다. 더 나아가 ‘이곳’을 좋아해 보려고 한다. 연서의 정원을, 연신내를,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 모두를. 훗날 내가 이곳에 존재했었음을 돌이켜볼 수 있는 장소들이 두 배로, 네 배로 늘어나도록.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연서의 정원’을 찾아간다.

언젠가 ‘연서의 정원’을 찾아올 당신도, 마침내 ‘이곳’을 좋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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