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박세인
2024.06.17 22:29
바야흐로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실감 나는 요즘이다. 스마트폰만 켜면 카테고리를 불문하고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진과 영상들이 그걸 증명한다. 어느새 이미 우리 엄마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알고리즘은 나에게 흥미로운 썸네일을 스윽 내민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썸네일을 클릭해 홀린 듯이 콘텐츠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깔깔 웃으며 스크롤을 하염없이 내리게 된다. 때로는 너무 과도한 정보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이미 ’도파민 중독’ 상태인 내 뇌는 또다시 소셜 미디어 앱을 클릭하도록 손을 조종한다. 등굣길에 지하철 속 사람들을 슥 훑어보면 모두가 핸드폰을 쳐다보는 데에 여념이 없다. 가끔 이어폰도 핸드폰도 없이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파민 중독의 여파인지, 최근에는 내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붙은 말이 생겼다. “나 방금 뭐 하려고 했더라..?”
매일 반복되는 무채색 일상에 색을 부여하는 존재가 스마트폰뿐이라니. 문득 이대로 가다가는 유서에 스마트폰도 같이 묻어달라고 적을 것 같아 두려움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런 현실에 권태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연초에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줄이고 책을 더 많이 읽자고 다짐한 지 벌써 반 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책상에는 먼지 쌓인 책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묵은 다짐을 실천하기로 했다. 유튜브를 볼 수 있는 태블릿 대신, 책상 구석에 처박혀 있던 반쯤 읽다 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새절역 근처 주택가에 위치한 ‘파브스 커피’. 얼마 전 새절역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지나가는 중 눈에 띄었던 곳이다. 주변의 평범한 풍경과 다르게 우드톤의 모던한 인테리어. 그리고 화창한 햇볕이 내리쬐는 야외 테이블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의 모습은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에서’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있는 곳이 은평구가 아니고 파리의 어느 작은 도시인 듯한 우스운 착각도 일었다. 그 순간이 인상 깊게 남아 언젠가 한 번 꼭 방문해 보고 싶었다.
다시 찾아간 파브스 커피는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고 싶었지만 언제나 인기가 많은 좌석인지 먼저 온 손님이 차지하고 있어 실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밖에서 지나가며 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실내의 층고가 꽤 높은 편이라 개방감이 느껴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 테이블 손님이 데려온 귀여운 강아지가 보여 몰래 눈인사를 건네보기도 했다.
주문을 하기 위해 메뉴판을 보는데 여러 종류의 원두가 적혀있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커피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하기 쉽도록 원두의 이름뿐만 아니라 원두에서 느껴지는 맛까지 적어놓은 점에서 사장님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커피를 잘 먹지 않는 나지만, 커피에 대한 자신감이 눈에 보여 용기 내어 바닐라빈 라떼를 주문했다. 한 입 먹으니 오랜만에 느끼는 라떼의 풍미 깊고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지금껏 먹어온 라떼와는 다르게 먹고 난 뒤 입안이 텁텁한 특유의 느낌이 덜해서 신기했다.
오랜만에 마신 라떼만큼 오랜만에 펼친 ‘코스모스’에는 흥미로운 사실과 교훈이 가득했다. 코스모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첫번째 페이지에 있는 구절이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 구절은 이 책의 내용을 관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관통한다.
무려 138억년이라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을 겪은 우주 안에서 우리는 겨우 100년 남짓한 시간을 살아간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결국 이 세계에 존재해 현재의 삶을 누릴 수 있음에 그리고 모든 선택의 확률에 감사해야 한다. 많고 많은 카페 중에 하필이면 파브스 커피를 발견해 이곳으로 오게 된 확률, 오랜만에 주문해서 먹은 라떼가 내 마음에 쏙 들 확률 등등.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비로소 의미가 되어 내게 다가온다.
짧은 시간 머문 것 치고는 많은 걸 깨닫는 날이었다. 어찌 됐든 책을 조금이라도 더 읽자는 나의 연초 다짐을 얄팍하게나마 실천하기도 했다. 기분 탓인지 오는 길에는 무겁게만 느껴졌던 책의 무게가 집에 가는 길에는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찰나의 확률을 뚫고 발견해낸 파브스 커피에서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나를 위한 ‘도파민 해독’을 실천할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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