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빙

계절감을 느끼는 즐거움 - 칵테일바 아마

큐레이터 산책자

2024.06.27 16:58

친구와 망원동을 갔던 유월의 평일 저녁 날, 식사 후 카페를 갈까 하다 일찍 문을 닫은 곳이 많은 탓에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여차하면 망원 한강공원에 가자고 설득하려 했는데, 문득 골목 옆 작은 가게의 통 유리창 안으로 아늑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입간판을 보니 아마(AMA)라는 칵테일바였다. 작은 공간에 바 테이블이 세로로 놓여있고, 이를 따라 초록 식물과 꽃들이 오목조목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분위기에 이끌린 우리는 자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엔 작은 테이블 좌석도 있었다. 2-3인 정도의 소규모 인원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 좋은 분위기다.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니 칵테일 이름에 여름의 단어들이 가득했다. 시그니처 칵테일은 계절 별로 3-4개 종류가 판매되는데, 칵테일에 들어가는 시럽과 퓨레를 직접 만드신다고 한다. 방문 당시엔 대표적인 여름 과일로 만든 '수박 바질 스매쉬', 초당옥수수 재료 칵테일에 연잎에 맺힌 빗방울의 분위기를 담은 '희우', 멜론 베이스로 만든 '여름의 정원'이 메뉴판에 적혀있었다. 봄에는 봄햇살, 가을엔 낙엽, 겨울엔 루돌프 사슴코와 같은 심상을 칵테일에 담아내신다고 한다.

 

시그니처 칵테일 외에도 내추럴와인 종류가 많았고, 계절과일이나 치즈 등 간단한 안주가 마련되어있었다. 기본 사이드로는 크래커와 크림치즈가 곁들여 나오는데, 시판 크림치즈가 아닌 부드러운 스프레드 타입으로 따로 만드시는 듯 했다. 계속해서 술술 들어가는 맛으로,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먹고 싶다면 1500원에 추가가 가능하다. 우리는 간단히 칵테일만 즐기기로 했고 매력적인 칵테일들 중 고민하다 수박 바질 스매쉬를 한 잔씩 주문했다. 어떤 칵테일이 나올까 기다리는 시간이 두근두근했다. 이윽고 나온 칵테일을 맛보고선, 둘 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름의 맛이다! 달달하면서도 시원하고 적당한 도수가 느껴졌다. 수박과 바질의 조화가 향긋했다. 초여름 저녁의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이었다. 잔에 올려진 바질잎은 크래커와 곁들여 먹기에도 좋았다.

첫 번째 잔에 반했던 우리는 궁금했던 '여름의 정원' 한 잔을 더 시켰다. 여름의 정원은 꽃이 그려진 찻잔에 식물이 장식되어 작은 테라리움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메론과 레몬으로 주요한 맛을 냈는데, 역시 앞선 잔과는 다른 매력의 여름맛이다. 이렇게 한 잔만으로 즐길 수 있는 계절감이라니, 또 하나의 즐거운 방법이 될 것 같다.

계절을 느끼는 감각은 순간을 더 생기있게 만들어 낸다. 그중에서도 풍경을 관찰하는 일이 그렇다. 나무엔 제각기 다른 형태의 이파리들이 돋아나고, 꽃들은 차례차례 만개하며 계절의 시간들을 채운다. 벚꽃이 져도 겹벚꽃이 피어나고, 다음엔 라일락과 장미, 접시꽃과 능소화가 피어난다. 한여름 산책 중 진홍색 꽃이 핀 배롱나무 곁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기분이 내겐 여름 그 자체이다. 사실 난 익숙히 알고있는 장미조차 5월 쯤 거리에 피어난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계절의 풍경을 감각해 본 것은 스무 살 때가 처음이었다.

내 인생의 스무 살은, 학교라는 울타리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어른이 되지도 못 한 때였다. 원하던 전공 진학에 실패한 뒤 취업이 잘 되는 계열에 합격했지만 이를 포기하고 다시 한 번 입시에 도전했었다. 친구들이 캠퍼스를 오갈 때 독서실을 오갔다. 초반엔 독서실 근처 횟집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를 보며 내 모습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다 늦겨울의 추위가 지나고 초록이 올라오던 초봄 즈음, 우연히 가보지 않았던 인근 주공아파트 사잇길을 걷고있는데 빼꼼히 민들레가 길가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들꽃 하나일 뿐이었겠으나, 당시의 나에겐 삭막한 겨울을 지난 뒤 말갛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받는 것 같았다.

이후 그 길을 다시 걸었다. 소담하면서도 녹음 짙은 길, 길가의 화단을 따라 걸으니 몰두하고 있던 머릿속이 환기되는 기분을 느꼈다. 지난 12년의 의무교육 기간 동안은 이렇게 평일 낮에 동네 풍경 속을 걷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구나. 학생, 직장인들이 일과를 보내는 시간에 바깥을 찬찬히 걷는 기분이 낯설고도 좋았다. 처음으로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일에 편안함을 느꼈다. 매일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집중이 안 될 때도 길을 걸었다.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길 끝의 하천을 따라 멀리 나갔다 오기도 했다. 11월에 있을 수능까지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바뀌는 계절의 풍경들을 관찰하며 공부 밖 세상의 생동감을 느꼈다. 스무 살이 지나고선 이 동네에 갈 일이 없었지만, 이 때의 기억이 좋아 아직도 종종 찾아가곤 한다.

각자 좋아하는 계절이 있고, 이를 감각하는 기분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 있다면, 아마를 찾아가 그 계절의 매력을 발견해봐도 좋겠다. 사장님은 칵테일 한 잔에 계절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편이라고 하셨다. 술과 계절을 사랑하는 둥글둥글한 성격의 사장님과의 대화도 이곳을 찾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또 아마의 메뉴판엔 오후 10시 이후에만 주문할 수 있는 특별메뉴로 똠얌페이스트를 곁들인 육개장을 팔고 있다. 속을 풀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메뉴에서 술에 대한 사장님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운 좋게 워크인으로 찾아갔지만, 네이버 플레이스에서 바 또는 테이블 좌석 예약이 가능하다. 좌석이 적은 공간이다보니 네이버 예약 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계절을 감각하는 즐거움을 '아마'에서 늘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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