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은평의 공간 - 은평역사한옥박물관
큐레이터 박지영
2024.06.04 21:25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며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안암에서 자취 생활을 이어오다, 석사 수료 후 운 좋게 이 곳에 정착한지 한달 가량 되었다. 청년 주택에 당첨되어 이사온 것이었기 때문에 연신내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연신내에 대한 첫인상은 “사람 사는 동네”였다. 서울 어디든 사람이 가득하지 않겠느냐만은 연신내는 조금 달랐다. 아침에는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가게 문을 여는 사장님의 모습, 점심에는 시장 구경을 온 가족과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을 보는 어머님의 모습, 저녁에는 퇴근하는 직장인과 간편식품을 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채롭게 볼 수 있었다.
유독 장, 가게, 시장과 같은 소비의 장을 관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사 후 가장 많이 방문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살던 원룸은 부엌이 좁고 냉장고가 작았던 탓에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기 어려웠다. 이사 이후 좀 더 넓어진 부엌, 커진 냉장고로 인해 요리에 취미를 붙이며 보다 양질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먹는 것이 삶의 낙인 내가 맛있는 음식을 편히 해먹게 되며 내게 있어 연신내는 더욱 좋은 이미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식(食) 뿐만 아니라 휴(休) 역시 내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집에서도 충분히 쉴 수 있지만, 반복되는 생활은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던 중, 같은 학과 박사 선생님과 대화하다 자연스레 거주지 이야기가 나왔다. 이 대화로 인해 뜻밖의 공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선생님의 근무지가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박물관을 좋아하는 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마음을 든든히 불리고자, 길을 나서게 되었다.
개인적 견해로 은평구의 가장 큰 메리트는 북한산이 어디서나 보인다는 점이다. 아직 겨울의 풍경만 보았지만, 눈이 가득 쌓인 모습을 감명 깊게 본 나로서 또 다른 세 계절이 더욱 기대되기도 한다. 북한산과 은평한옥마을이 어우러진 풍광은 시간의 변천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꽃 피기 전, 미세먼지와 황사가 가득한 3월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꽃봉오리와 따듯한 햇살로 봄의 설렘을 미리 느껴지도록 해주었다. 이 곳에 위치한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의 앞마당은 문인석이 관람객을 따스히 반겨주고, 건물은 유려한 곡선을 지니며 한옥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총 세 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의 본격적인 전시는 2층부터 시작된다. 박물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은평역사실에는 은평의 역사와 은평뉴타운을 개발하면서 발견된 유물을 전시하며 은평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굿당인 금성당, 진관사처럼 은평의 역사적 공간에 대해 소개받을 수 있기도 하다. 전시를 둘러보며 내게 있어 아직은 데면한 은평의 옛 모습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3층 한옥전시실은 조선시대에서 현대까지의 한옥 발전 과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한옥의 구성 요소와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한옥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개괄적인 역사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한옥 건축 과정을 특히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데, 전시의 끝 무렵에 내가 직접 한옥 건축을 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은평에 대해 새로이 알았다면, 이제 눈으로 은평의 풍광을 보며 빵빵해진 마음을 소화시킬 시간이다. 먼저 2층에 위치한 은평마당은 액자 프레임처럼 박물관 기둥 사이에 담긴 북한산과 허리에 걸린 구름, 푸르른 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은평한옥마을을 감상하고 싶다면 3층 한옥전망대에 오르면 된다. 2층과 달리 지붕이 없어 탁 트인 공간의 온 사방에서 은평의 자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3층 한옥전망대에서 조금만 오른편으로 가면 용출봉이 보이는 정자인 용출정이 있다. 용출정에 앉아 고즈넉하고 처마에 살짝 걸린 북한산의 모습을 여유롭게 즐기며 오래도록 북한산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구름 흘러가듯 고민도 흘러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유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 때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나에게 힘겹지 않았는지 한 번 돌이켜 물어봄 역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그 물음의 과정에서 휴식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 공간이라는 요소는 참 중요하다. 누군가는 예쁜 카페, 유명한 맛집이 휴식이 될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이곳은 휴식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어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소박할지 모르는 이번 나의 큐레이팅이 누군가에게 쉼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톺아보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
댓글 목록
댓글 개